[스크랩] 경북 청도 적천사 : 절집에 들르다.
2006. 12. 2. 13:44ㆍ난초 기르기·화보/산채 다녀온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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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을 이기지 못해 절집을 나오는 이들도 있고,그 적막이 좋아서 절집으로 들어가는 이들도 있다. 신라 신문왕 때의 여승 설요(薛瑤)는 앞의 사례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모습이 아름다웠다는 설요는 스물한 살 되던 해에 한시(返俗謠) 한 줄을 써놓고 환속해 버렸다. "(…)/텅 빈 골짜기 사람이 보이질 않네(洞寂滅兮不見人)/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瑤草芳兮春思芬)/장차 어찌할거나,이 젊음을(蔣奈何兮是靑春)." 그런데,나이 차이 때문인가? 설요와 달리 '삼국유사'의 일연(인각)스님은 절집과 그 일대의 적막을 칭송하는 쪽이다. 일연은 한 절집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잇다. "(…)/골짜기가 비어,문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에 대답하네(谷虛聲答打門)/(…)/무지개는 푸른 비단을 끌어다 고송에 걸었네(虹曳靑蘿掛古松)/늙은이 며칠 머무름을 괴이타 마라(莫怪老人留數日)." 한데,일연이 이토록 칭송한 절집은 대체 어디인가? 경북 청도군 화악산에 거처를 둔 절집,'적천사'이다. 적천사는 7세기때 신라의 원효대사가 수행정진을 위해 조촐하게 마련한 토굴이 모태다. 적천사는 적막한 절이다. 평일이라고는 하지만,온종일 절집에 들른 속인이라고는 대구에서 풍문을 듣고 찾아 온 두 명의 젊은 여인이 전부다. 이름난 여승 사찰인 운문사의 위세에 눌려서 그렇거나,절에 다다르는 길이 다소 난감하기 때문인 듯하다. 아닌게 아니라 큰 길에서 절집까지는 2.5㎞ 시멘트 포장도로인데,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협소하다. 따라서 버스를 타고 온 이들은 큰 길가의 원리마을 빈터에 버스를 세우고 30분 정도를 걸어야만 한다. 큰 길 가에 서 있는 이정표도 눈에 잘 띄지 않아 그 가치가 상당히 미미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적천사는 인적이 드물어서 오히려 고맙고 편안한 절집으로 간주될 법하다. ·웃는 사천왕 적천사에서 손님을 가장 먼저 맞는 것은 사천왕문 앞의 우람한 은행나무이다. <감상포인트> 은행나무 앞에서 충분히 감탄을 했더라도 탄복할 거리는 더 남아 있다. 적천사에서는 조선 숙종대에 조성된 목조 사천왕상(四天王像)과 관음괘불탱,대웅전 등을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탄복을 해야 한다. 이 절집에서는 속가의 현관격인 일주문과 불이문(해탈문)을 볼 수가 없다. 곧바로 사천왕문이다. 이 곳의 사천왕상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53호다. 사방을 지키는 천왕들은 날개같은 천의(하늘나라의 옷)에 갑옷을 두른 무장의 모습을 한 채 앉아 있는데,높이가 3.4~3.8m로 대단한 거구여서 외관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비파를,북방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보탑을,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보검을,서방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과 여의주를 각각 손에 쥔 채 불법을 수호하는 한편,마귀의 습격을 예방하고 있다. 적천사 사천왕은 이미 악귀들을 하나씩 도맡아 제압하고 있는 중이다. 사천왕은 저마다 왼발로 악귀들의 배와 등을 짓밟고 있다. 사천왕과 악귀들의 대비되는 표정은 흥미로움을 더한다. 이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양식을 빼어 닮아 대체로 정감있게 웃고 있는 얼굴이다. 악귀들은 표독스럽거나 비열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잘못을 빌고 있기는 한데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징벌을 내리면서 웃고 있다는 건 또 무엇을 뜻하는가. 생각하기에,모름지기 징벌은 복수나 보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야만 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한편 동행한 청도의 문화유산해설사 박윤제씨는 "목조 사천왕상의 틀은 매우 훌륭하지만 용과 탑을 비롯한 일부 부속물들이 옛 것 그대로가 아니고 누군가가 옷깃 채색을 잘못하는 바람에 의미가 반감돼 버렸다"면서 "그때문에 문화재 등록을 추진했을 때 애를 먹었다"고 아쉬워 했다. ·관세음 보살,관세음 보살 사천왕문을 나와서 여섯 칸 돌계단을 올라가면 오래된 누각에 닿는다. 무차루(無遮樓)다. 주지 덕현 스님은 무차루를 무시로 개방해 두고 있다. 다기와 차,찻물을 늘 한 자리에 놓아 두고 아무나 와서 차를 마시라고 한다. 무차루 뒤는 대웅전인데 그 앞에 300여 년 연륜의 쇠로 된 당간지주 두 기가 우뚝 솟아 있다. 적천사의 명물인 관음괘불탱을 걸기 위한 것이다. 괘불탱은 부처님 오신 날처럼 중요한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 절 마당에 내 거는 불교 그림을 말한다. 적천사의 관음괘불탱은 높이 16.3m,너비 5.3m로서 보기에 장쾌하다. '자비의 화신' 관세음 보살이 연분홍 연꽃이 달린 연꽃 가지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우아한 자태로 서 있다. 문화재청은 이 괘불탱과 지주를 보물 제1432호로 지정했다. · 대웅전 앞마당의 적막 적천사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21호다. 강단져 보이지만 고찰의 대웅전 치고는 폭이 좁고 가분수 같은 느낌을 준다. 주지스님에 따르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적천사는 몇 차례 화재에 시달렸는데,일제때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인근 옥련암의 대웅전을 뜯어와 복원한 것이 지금의 대웅전이라고 한다. 대웅전 안을 들여다 보니 정면 수미단 위에 황금빛 석가모니불이 앉아 있다. 좌우에는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자리잡고 있다. 석가모니불 뒤로는 후불탱이 보인다. 이 후불탱은 진짜가 아니라 사진으로 실사한 것이다. 도난을 우려해 진짜는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안치해 두고 있다. 박윤제씨는 "도둑들은 3분이면 후불탱을 벽에서 분리할 수 있다고 한다"면서 "참 어이 없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천왕들 발 아래의 악귀들이 곧 문화재 도둑들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발걸음을 절집 밖 부도(浮圖:승려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의 숲으로 옮긴다. 담이 없어서 그냥 걸어가면 바깥 길이다. 절 왼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른다. 오솔길 입구에서 왼편으로 연꽃이 만개한 연못이 보이고,텅 빈 암자터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융성했던 시절의 절집 규모가 설핏 머릿 속에 그려진다. 옛날에는 이 일대에 암자가 여럿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솔암만 남아 있다. 1분 정도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왼편 풀숲 위로 어딘지 '왜색풍'이 묻어나는 오층 석탑이 우뚝 서 있다. 1947년에 준공된 '건국기념탑'이다. 광복을 자축하고 국토통일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하는데,품새가 지나치게 매끈하고 도도해서 오래된 절집의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어쩔 수 없이 괴리감이 찾아든다. 그래서인지 탑 바로 아래에서 먼 산을 바라보고 선 부도 7기의 고색창연이 차라리 무색해 지고 있다. 절집으로 되돌아오니 대웅전 앞마당은 여전히 텅 비어 있다. 제 멋대로 산다는 고양이 한 마리가 인기척에도 아랑곳 없이 뙤약볕 쏟아지는 마당을 느릿느릿 가로질러 가고 있다. 나비들은 꽃들 주위를 어지러이 날고 있다. 적막감이 감돈다. 이 지독한 적막의 한 가운데에서 문득 환속한 설요를 떠올린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설요와 일연의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뭇 중생에 불과할 진대,부디 저 번뇌와 망상들이 이곳의 적막과 더불어 고요히 잦아들기를 바랄 따름이다. 글=이광우기자 leekw@busanilbo.com 사진=이재찬기자 chan@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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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분통이
글쓴이 : 최문곤 원글보기
메모 : 2006-11-19 청도 적천사 인근 산채,산행하였으며 위에글은 스크랩 해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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